When I Grow Up
I Wanna Be
Title: When I grow up, I wanna be / 장래희망 將來希望
Date: Nov. 22 - 25, 2018
Venue: Foundwill Art Society (FAS), Seoul, South Korea
Artists: Florian Bong-kil Grosse, Lim Sodam, Yang Jiwon
Curated by Yujin Lee
Exhibition Text by Yujin Lee
만 19세 이상의 남녀를 우리는 성인 成人이라고 한다. 성인이란 ‘자라서 어른이 된 사람’을 뜻하는데, ‘어른’이란 말의 유래는 ‘얼운’ 혹은 ‘얼우다’라는 동사가 변형된 것으로, ‘얼우다’는 ‘혼인하다’의 옛말이다. 즉, ‘어른’ 이란 ‘혼인을 하여 자식을 가진 사람’으로 풀이된다. 여기서 문득 엄마가 내게 자주 하는 잔소리가 생각난다: ‘결혼해서 애를 낳아야 진짜 어른이 되는 거다.” 나는 30대 초반의 미혼여성이며 물론 자식도 없다.
엄마 잔소리의 핵심는 ‘빨리 어른이 돼라’다. 하지만 나는 되묻고 싶다. 우리는 꼭 어른이 되어야 할까? 사회적으로 ’어른’이란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은 사람’인데, 이를 ‘성장이 끝나서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해석한다면 너무 가혹한 것일까? 사실 흙수저니 삼포시대니 하는 오늘날, 남녀노소 누구든 개인에게 요구되는 수많은 사회적 틀을 뿌리치고 살아갈 수 있는 현대인은 드물리라. 그렇게 나또한 절망감과 공허함 그리고 멍한 상태를 넘나들며 생활하던 찰나에 제주도에서 율 이라는 7살 여자아이를 만났다. 미숙한 몸짓으로 매일 마당 여기저기를 활보하며 관찰하고 습득한 지식을 내게 서툴지만 순박하게 설명해주는 호기심 많은 율은 미래의 무궁무진한 변화와 가능성의 표상이었다. 나는 율과의 짧은 만남을 통해 다시 한번 꿈을 꾸기 시작했다.
인간의 성장에 마침표란 있을 수 없다. 이번 전시 제목 <장래희망 将来希望>은 절망의 미래를 희망의 미래로, 무지 無知의 두려움을 배움의 가능성으로 전환시키자는 의지를 품고 있다. 智猶水也 不流則腐 지유수야 불류칙부 (宋名臣言行錄 송명신언행록 中) ‘지혜는 물과 같은 것이니, 흐르지 않으면 썩는다.’ 움직이지 않는 것, 변화하지 않은 것은 썩을 수밖에 없다. 이번 전시에 참여하는 세 명의 작가는 사진, 도예, 그리고 드로잉을 통해 미숙함, 호기심, 그리고 낯섦의 미학을 발현하여 자아 自我를 넘어 경계나 한계가 없는 꿈의 세계, 무아 無我의 세계를 함께 그려본다.
플로리안 봉길 그로스, 임소담, 그리고 양지원 작가의 공통점은 익숙함과 낯섦 사이를 놀이터 삼아 묻혀진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는 내러티브를 찾아간다는 점이다.
회화작가로 알려진 임소담 작가는 2015년 신체(손)의 촉감을 새롭게 자극했던 도자를 작품의 매체로 이용하기 시작한다. 캔버스와 유화에서 흙과 손으로 돌아온 것이다. 돌아왔지만 낯선 곳, 미숙하기에 자유로울 수 있는 곳, 붓을 내려놓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흙과의 교감은 그래서 더 강렬하지 않았을까? 임소담 작가의 도자는 인간 본연의 필연적 원초성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그 과정은 놀이이면서 예술이고 하나의 실험적 단계인 동시에 독립된 결정체인 것이다.
임소담 작가가 창작의 과정에서 신체의 즉흥적 반응에 대응했다면, 양지원 작가의 게릴라形 작업 방식은 매일 매일의 미미한 순간을 관찰하고 수집하고 기록하고 쌓아가는 그림일기와 같다. 시간의 축척. 이것은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이다. 양지원 작가는 보이지 않는 것(혹은 보지 않으려는 것)을 사진, 드로잉, 회화, 텍스트를 통해 지속적으로 시각화하고 그것을 다시금 생활 속에 녹여낸다. 장소 특정적(site-specific) 작품의 경우 결국엔 소멸하여 기록 혹은 기억으로만 존재하는데, 이것은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흙을 가지고 놀 듯, 하찮고 의미 없는 것에 생명을 불어넣고 또 서슴없이 떠나버릴 수 있는 유형 有形과 무형 無形 사이를 넘나드는 예술의 한 경지일 것이다.
결과보다 과정을, 거시적 분석보다 미시적 관찰을 중시하는 양지원 작가의 작품세계는 플로리안 봉길 그로스 작가의 무심코 찍은 듯 진중한 사진 세계에 함축되어 있다. 그로스 작가는 “나는 결과물에 대한 어떠한 전망도 없었다. 단지 필요에 의해 셔터를 눌렀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There was no prospect in any results during the process, only the demand to take these pictures as I found them.”) 여기서 ‘필요’란 무의식에 잠재된 끌림, 앞서도 언급한 ‘신체의 즉흥적 반응’이 아닐까? 한 살 때 독일로 입양된 그로스 작가는 그 후 30년 만에 한국을 방문했고 모든 것이 처음인 어린아이의 눈으로 한국을 바라볼 수 있었다. 우리에게 익숙하고 사소한 것들은 그로스 작가에게는 무구하고 위대했다. 이 지점에서 신경림 시인의 시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의 마지막 부분이 떠오른다.
나는 대처로 나왔다.
이곳 저곳 떠도는 즐거움도 알았다,
바다를 건너 먼 세상으로 날아도 갔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들었다.
하지만 멀리 다닐수록, 많이 보고 들을수록
이상하게도 내 시야는 차츰 좁아져
내 망막에는 마침내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의
실루엣만 남았다.
내게는 다시 이것이
세상의 전부가 되었다.
한 아이의 눈앞에 세상 전부가 있었다. 이번 전시에서 우리는 플로리안 봉길 그로스, 임소담, 그리고 양지원 작가의 때 묻지 않고 진실한 소우주를 마주한다. 우리는 각자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내제하고 있다. <장래희망 將來希望> 展을 통해 만나는 세 명의 작가들과 함께 앞으로 다가올 세상을 다시 한번 새로이 꿈꿔보고 싶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