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tangled Bodies

Left: Bahc Gaain, Two Big Rotations, 2015

Single-channel video, 11 minuets 15 seconds

Title:  Entangled Bodies / 얽히고설키고
Date:  Sep. 21 - Oct. 12, 2019
Venue:  Entry Gallery (previously Gallery Entrée), Seoul, South Korea
Artists:  Bahc Gaain, Shawn Park, Eeva Rose, Jennifer Bornstein, Audrey Brown, Edward Maplethorpe
Curated by Yujin Lee and Jeffery Kim

Exhibition Text by Yujin Lee
인체를 개념적으로 형상화한 이집트 미술, 완벽한 비례와 이상미를 추구한 고대 그리스 조각상,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해부학 드로잉 등이 보여주듯이, 예술가에게 ‘몸’이란 남다른 영감과 끝없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영원한 진리 같은 것이다. 하지만 여성의 몸을 표현함에서 있어서는 주체성이 결여된 관망의 대상으로 혹은 남성의 페티시를 충족시켜주기 위한 장치인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일례로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1863)>가 떠오르는데, 미술사에 관심 있는 자라면 이 작품에서 마르셀 뒤샹의 은퇴작으로 알려진 <전라의 이브 바비츠와 체스를 두고 있는 마르셀 뒤샹(1963)>을 연상할지도 모르겠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 두 작품은 정확히 100년을 사이에 두고 발표되었다. 두 작품에는 공통으로 정장을 입은 남성(들)과 나체의 여성이 함께 등장하지만 마네의 나체 여성은 도전적으로 그림 밖 관객을 응시하는 반면, 뒤샹의 나체 여성인 바비츠는 자신이 벌거벗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듯 체스 게임에 집중하고 있다. 마네는 이 그림을 당시 인상주의 작가들이 즐겼던 사상화 대신 작업실에서 완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가 파리에서 금기시되었지만 즐비했던 매춘 현장을 주제로 삼았기 때문이다. 서양 미술사에서 여성의 나체는 신성한 여신 혹은 알레고리로써 등장했는데, 마네의 나체 여성은 단지 사회 하층부에 속한 매춘부일 뿐이다. 여기서 마네의 예술적 천재성에 박수 쳐주고 싶을지도 모르겠지만, 여성의 몸 하나의 이상(여신)에서 다른 하나의 대상(매춘부)으로 바뀌었을 뿐, 여성의 주체성을 회복시켜주지는 못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전라의 이브 바비츠와 체스를 두고 있는 마르셀 뒤샹(1963)>과의 차이점이 드러난다. 당시 20살이었던 바비츠가 나체로 76세의 뒤샹과 갤러리에서 체스를 두는 사진 촬영에 임하게 된 이유는... 당시 저명한 예술가 뒤샹의 개인전을 기획한 31세 청년은 바비츠와 불륜 관계를 맺고 있던 유부남이었다. LA의 주요 인사들이 모두 초청된 뒤샹의 전시 개막식에 바비츠를 초대하지 않은 홉스를 괘씸히 여긴 그녀는 뒤샹의 뮤즈가 되어 불륜남에게 복수할 생각에 망설임 없이 옷을 벗었고 결국 이 광경을 발견한 남자는 너무 놀라 씹고 있던 껌까지 바닥에 뱉어버릴 정도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내막보다 이 사진은 미술계 은퇴를 선언한 후 체스에 열중했던 뒤샹의 ‘행위’까지도 개념 미술로 포옹하는 상징적인 작품으로 남게 되었다. 최근 미국에서 일어난 미투 운동으로 작품 속 바비츠의 경험담이 주목받게 되는데, 우연히도 올해는 바비츠가 1963년 당시 76세였던 뒤샹의 나이가 된 해로, 세상사의 돌고 돎은 참으로 예측할 수 없지 않은가.
1.
바비츠의 일화는 여성의 몸을 바라보고 표현했던 가부장적 시선이 20세기에 들어서서 지속해서 도전되어 왔고 그 주체가 남성에서 여성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여성이 공공장소에서 자유롭게 옷을 벗어 던진다는 것은 꾀나 선정적이었기에 여러장의 사진 중 최종적으로 바비츠가 허락한 사진은 자신의 얼굴이 가려진 컷이었다. 이에 반해 <얽히고설키고>에 전시 된 이바 로즈(Eeva Rose / b. 1987)의 바디 프린트는 언뜻 보면 여느 나체 여성의 추상적 형상처럼 보이지만, 작품 앞으로 바짝 다가서서 보면 눈으로는 식별하기 힘들 것 같은 작가의 살갗 무늬와 털의 흔적뿐 아니라 인체 고유의 DNA와 페로몬까지 종이의 표면에 담겨 있다는 생각에 코끝이 찡해질 것이다. ‘몸의 보편성’을 통해 바비츠가 무의식적으로 감추려 했던 개인사를 이바 로즈는 오히려 더 적나라하게 발현하고 있는 것이다. 
10년 전 하나뿐인 친오빠를 교통사고로 잃은 그는 삶과 죽음 그리고 그사이에 존재하는 기억을 바탕으로 작업해왔다. 초기에는 기억의 시각적 기록물인 ‘사진’(특히 디지털 사진)을 재료 삼아 육체와 육체를 담은 이미지 사이의 괴리감에 주목하였다. 카메라와 사진이 처음 발명되어 대중화되기 시작한 19세기 중순쯤, 마법같이 자신과 똑같은 모습의 사람이 찍힌 은판을 손에 넣었을 때 혹시나 카메라가 자신의 영혼까지 찍어갈 수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영혼과 이미지 사이에서 이바 로즈는 오빠의 디지털 초상화를 가지고 픽셀이 보일 정도로 확대 분해하거나 출력 후 다른 종이에 녹여내며 다양한 방식으로 작업하던 도중 끓는 물에 크게 데이는 예기치 않은 사고를 겪게 된다.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던 그 순간, 그는 살아있음을 체감하고 화상으로 흉측해진 자신의 피부를 매일 같이 마주하며 몸 그 자체가 내포하는 생사(生死)의 상징성을 시각화하기 시작한 것이 본 전시에 소개될 바디 프린팅 시리즈이다.
“...누군가의 노력과 보호가 없었다면 끝나버렸을 핏덩이로 태어난 나는 성장하여 한 여인의 신체 속에서 건강히 생존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가장 신비스럽고 성스러운 발견이었다. 이것은 기록할 가치가 분명한 것이었다.” - 작업 노트 中
이바 로즈는 바디 프린팅으로 육체적 고통을 통해 지각하는 ‘살아있음’을 시각적으로 구체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단절 속 치유될 수 없었던 상처를 스스로 보듬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오빠의 사진은 더는 찍을 수 없지만 자신의 몸은 찍을 수 있다. 그의 예전 사진 작업이 되돌릴 수 없는 시간과 그 속에 갇혀버린 영적 흔적을 드러내려는 시도였다면, 바디 프린트는 감출 수 없는 생명력과 부인할 수 없는 육체의 존재감에서 뿜어져 나오는 몸의 강인함과 불멸성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2.
육체란 이렇듯 나약한 것 같지만 강인하고 평범한 듯 예사롭지 않다. 특히 페미니즘에서 몸은 중요한 상징으로 작용한다. 제2, 제3세대 페미니스트 작가들이 여성의 사회적 정체성에 주목하며 자신의 몸을 직접 캔버스로 혹은 표현의 도구로 활용했다면,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주 무대로 활용하는 제4세대 페미니스트들은 더욱 국제적인 맥락에서 불특정 대상에게 여성성에 대한 탐구와 시각적 표현을 공유하고 있다.
인스타그램 계정 @imakegirls로 활동하고 있는 오드리 브라운(Audrey Brown)은 미국 시카고에 거주하는 그래픽 디자이너 겸 일러스트레이터로, 그의 어카운트명에서 알 수 있듯이 주로 ‘소녀’ 혹은 넓은 의미에서 여성의 몸을 관찰하고 표현한다. 여기서, 브라운이 ‘나는 소녀를 그린다’는 뜻인 ‘idrawgirls’ 대신 ‘imakegirls’의 ‘만들다’라는 동사를 사용한 것에 주목해보자. ‘draw’ 보다 ‘make’가 내포하고 있는 창조의 의미는 훨씬 강한데, 그의 ‘소녀’들이 아름다운 여성의 몸의 획일화된 기준과 대비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본 전시에 소개될 <I make girls>는 A4 크기의 작은 드로잉임에도 불구하고 종이를 꽉 채운 육중한 체구의 존재감이 압도적이다. 과장되고 기묘한 몸짓을 취한 브라운의 ‘소녀’는 언뜻 콜롬비아 작가 페르난도 보테로의 페인팅을 연상시키는데, 보테로가 사회 비판적 의미에서 과장의 테크닉을 적용했다면, 브라운은 이상적 대안으로써 새로이 응용하고 있다. 힘을 쫙 뺀 일 획으로 유유히 창작된 브라운의 묵직한 ‘소녀’들은 사회에 대한 비관적 조롱이라기보다 육체의 무궁무진한 역동성과 다채로운 아름다움을 기념화하고 있다. 잠재적 이데아를 제시하는 그의 ‘소녀’를 보면서 변화무쌍한 인간의 가능성이 보드라우면서도 질긴 살가죽에 쌓여 꿈틀대고 있다고 상상해본다면, 어느새 그녀들에게 강한 동질감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3.
소셜미디아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은 누구나 콘텐츠의 제작, 편집, 그리고 유통까지 주체적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술가에게 (특히 오랫동안 독립성이 결여되었던 여성 작가에게)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이 있을까? 오드리 브라운과 마찬가지로 박가인 작가(Gaain Bahc / b. 1990) 역시 @whythereisnofuninmylife 라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통해 아버지의 일상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온라인 포토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다.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온전히 중력에 의지한 채 꿀잠을 청하는 중년 남성의 몸은 세상만사 제쳐놓고 덩그러니 남겨진 몸뚱어리가 아니고 무엇인가. 가족이라는 특수 관계 하에 작가는 무심한 듯 집요하게 집안에서만 목격할 수 있는 아버지의 유일무이한 몸동작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캡처하였다.
<얽히고설키고> 입구에서 마주하는 박가인 자가의 단채널 영상 <두 번의 회전(2015)>은 그가 @whythereisnofuninmylife 계정을 만들기 2년 전의 작품으로, 타인의 몸을 응시하는 그의 순진무구한 시선이 돌발적으로 발현하는 시발점이 아닐까 예측해 본다. 처음 이 영상을 보았을 때 한참을 봐도 이게 몸의 어느 부위인지 모른 채 꿈지럭거리는 살결을 보면서 (그리고 나도 모르게 한참을 보게 된다)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들 때쯤, 영상 아래 달린 다음과 같은 작가의 짧은 글을 발견하였다.
“연인은 서로의 눈빛에 반하고, 
웃는 얼굴을 마주하며 기뻐한다.
그리고 마침내 둘만의 은밀함으로 행복해한다.
그리고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불알이다.”
관객이 유심히 응시한 것은 바로 남성 육체의 가장 은밀한 부위를 꾀 긴 시간 동안 촬영한 클로즈업 영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영상에는 페티시적 눈길보단, 사랑하는 연인의 살아 숨 쉬는 몸 그리고 피부 속 꿈틀거림까지 알고 싶어 하는 그의 순수함 혹은 로맨틱함이 젖어있다. 나아가 관객은 이제 화면을 꽉 채운 남성의 음낭보다 카메라 뒤에 감춰진 작가의 눈, 표정, 그리고 생각으로 넘어가게 된다. 카메라를 경계로 분리된 두 육체 사이의 끌림은 불현듯 신육복의 <월하정인(18세기 후기)> 속 글귀를 떠오르게 한다.
月沈沈夜三更 달빛 어두운 밤 삼경
兩人心事兩人知 두 사람 마음이야 둘만이 알겠지
그리고 한 사람의 몸을 대하는 작가의 눈초리에서 500년 전 남몰래 인체를 해부해 드로잉으로 남긴 다빈치의 주체할 수 없는 사명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그것은 바로 상대의 몸을 대할 때 일방적으로 탐하고 해체하여 이해할 수 있는 분리된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두 인간 사이의 불가결한 매개체로써 무한한 관심, 애정, 그리고 강한 집념을 가지고 다가가야 하는 태도인 것이다. 박가인 작가는 올해 초부터 을지로에 위치한 ‘카페+펍’인 육일봉을 공동 운영하고 있다. 허름한 건물 옥상에 위치한 육일봉은 원래 가정집이었는데, 전에 계시던 어르신이 남기고 간 온갖 잡다한 물건, 가구, 그리고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품어 뭔가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낄 수 있다. 현대미술계에 질려 시작한 이 ‘영업장’을 통해 작가는 다양한 몸뚱어리들이 얽히고설키면서 대안적 가치들을 발견할 수 있는 만남의 장소를 제공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4. 
일상생활 속에 묻어나는 인간의 다양한 정체성을 ‘만남’ 혹은 ‘접촉’이라는 개념을 안에 담아내는 제니퍼 본스틴(Jennifer Bornstein / b. 1970)은 LA와 베를린을 베이스로 활동하는 시각 예술가이다. 사진을 전공한 작가는 뒤늦게 동판화를 접하게 되는데, 그래서 그런지 그림의 표현기법은 다소 어린아이가 그린 듯한 천진난만함 혹은 솔직함이 묻어있다. 작가는 주로 자신의 가족, 친구, 혹은 주변 인물의 초상화를 동판화로 제작해왔었는데, 본 전시에 소개될 두 장의 판화는 그러한 리얼리즘 혹은 구체성의 맥락을 벗어나 불특정적이고 추상적이다. 내장같이 생긴 꼬불꼬불하게 긴 튜브, 침대에 누워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있는 사람 같은 형상. 하지만 그것은 그냥 내 멋대로 그린 선들일 뿐인데, 왜 우리는 가늘게 여러 선을 뒤엉켜 그려놓은 것이 머리카락으로 보이며, 길게 꼬여진 창자 같은 가로 그림을 보면서 세로로 걸어 놓고 싶은 욕구가 드는 것일까. 어쩌면 육체란 실체가 없는, 특별하지도 특정적이지도 않은 인간이 만들어낸 하나의 개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지도 모르겠다.
5. 
에드워드 메이플소프(Edward Mapplethorpe / b.1960)의 <Screw> 시리즈를 통해 여성의 몸을 향한 남성의 시선으로 다시 한번 돌아와 보자. 유명한 사진작가 고(故)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남동생인 에드워드는 미국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사진작가 겸 시각 예술가로, 70년대 남성 누드와 동성애와 같은 도발적 주제를 사진에 담은 로버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는 <Screw> 시리즈에서 자신이 소년기에 성인지에서 봤던 사진 중 여성의 음부만을 도려낸 후 칠흑 같은 바탕에 단색으로 띄웠는데, 핏기없이 절단된 채 무심히 허공에 떠 있는 여성의 음부는 음란하기보단 19세기 메디컬 일러스트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그런 민감한 부위를 잡아당기는 의문의 손은 곧 강렬한 욕정을 느끼기 위한 전초라기엔 다소 투박스럽고 냉랭하며 마치 정육점의 고깃덩어리를 쥐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성애자 남성의 시선이라는 한계는 있지만, 메이플소프는 섹슈얼리티에 대해 처음으로 배우고 경험하게 되는 소년기의 기억을 더듬어 중년 남성의 시선, 나아가 사진가라면 부인할 수 없는 관음적 시선으로 바라본 여성의 육체에 대한 단상을 한걸음 멀리서 보여주고 있다.
6. 
뻥 뚫린 손바닥 구멍으로 모래인지 씨앗인지가 우두둑 관통하고 있고, 배경 저 멀리서 논란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는 얼굴. 이 작품의 제목은 <The Catcher(포수)>인데, 살덩어리를 움켜쥔 메이플소프의 손과 비교되는 작품이다. 실체가 없는 듯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그림 속 손은 누구의 손이며 무엇을 잡으려 하는 것이고, 잡으려고 했지만 잡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일부러 흘려보낸 것인가?
“이게 꿈이냐 생시냐”라는 옛말처럼, 박경종 작가(Shawn Park / b. 1979)의 작품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현상(現象)들은 실상(實相)인지 환상(幻相)인지 모호하며 꿈과 생시(生時) 사이 어딘가에 떠 있는 느낌을 준다. 또한, 그의 작품에선 앞뒤 순서 없이 배경이 설정되고 인물이 출현하며 사건이 발생한다. 이 모든 것이 우연인 듯 필연인 듯 조화로우면서 혼란스럽다. 특히 등장인물의 경우,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전하게 표현되는 것은 극히 드물며, 몸의 형상은 파편적으로 여기저기 나타났다 사라지거나 <시작의 끝> 속 한 쌍의 남녀처럼 유유히 배경 속으로 스며들기도 한다.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사람들과 생명을 보면서 하늘이 내린 씨앗 같다는 느낌을 받아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 작가 인터뷰 中
‘알몸의 남녀’ 하면 바로 생각나는 것은 아담과 이브가 아닐까? 아담과 이브는 서양미술사에서 지겹도록 표현해온 주제인데, 수많은 예제 중 28세에 요절한 이탈리안 르네상스 화가 마사초의 <낙원에서의 추방(1427)>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마사초는 서양미술에서 처음으로 원근법을 표현한 화가로 이전 중세시대 기독교 그림과는 달리 음양의 기법으로 얼굴의 섬세한 감정 표현까지 담아낸 것이 특징이다. 15세기에 욕망, 타락, 부끄러움 등 인간의 나약함을 일그러진 얼굴과 움츠러든 몸짓으로 드라마틱하게 표현한 마사초의 나체 남녀가 수치심의 상징이었다면, 1977년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와 울레이의 퍼포먼스 <Imponderabilia>는 ‘나체가 뭐 어때서?’라고 반문하며 이러한 인식을 전복시킨다. 이상적 낙원에서 추락한 아담과 이브가 아브라모비치와 울레이를 통해 당당하게 현실로 돌아왔다면 박경종 작가의 <시작과 끝> 속에서는 다시 이상을 향해 아련하게 걸어가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알몸으로 홀로 태어나 죽음 앞에서 영원을 함께 약속하는 남녀의 육체적 정신적 사랑(그리고 모순)이야말로 인간이 현세에서 취할 수 있는 최고의 낭만과 이상이 아닌가 싶다.
박경종 작가의 근작은 이미지뿐만 아니라 이미지가 그려진 재료(종이) 자체를 조각내어 파편화하는 경향이 나타나는데, 이는 수많은 몸뚱어리(소우주)들과 세상(대우주)은 한 몸으로서, 결국 하나의 공상(空相)이 아닐까 하는 이상야릇한 생각을 담고 있는 듯하다.
<얽히고설키고>의 작가들은 불안한 듯 자유롭게 작품의 표면 위에서 몸부림치며 관객과 마주한다. 이들은 예술가 본연의 관찰력과 호기심으로 멀쩡한 육체의 경계를 허물고 이 몸뚱어리 저 몸뚱어리를 우리 눈앞에 내던진다. ‘몸’은 보편성과 개별성을 동시에 가진 모순덩어리이다. 그것을 유머, 그로테스크, 혹은 엉뚱함으로 맞닥뜨리고 포용하는 것이 본 전시의 출발점이었다.

List of works
1 박가인, <두 번의 회전 / Two Big Rotations>, 11분 15초, 단채널 영상, 2015
2 이바 로즈, <진심 / the real heart>, 38.5 x 53 cm, 종이에 바디 프린트, 2019
3 박경종, <The Catcher>, 27 x 22 cm, 캔버스에 아크릴, 2018
4 & 6 에드워드 메이플소프, <Screw> 시리즈, 43 x 53 cm, 포토그라비어 동판화, 2015
5 오드리 브라운, <I make girls>, 21.5 x 28 cm, 종이에 펜과 마커, 2018
7 제니퍼 본스틴, <무제>, 30 x 35.5 cm, 동판화, 2018
8 박경종, <시작의 끝 / The End of the Beginning>, 38 x 45 cm, 캔버스에 아크릴 및 설치, 2018
9 이바 로즈, <첫날밤 / the first night>, 45.7 x 61 cm, 종이에 바디프린트, 2009
10 이바 로즈, <전체와 부분 / whole and parts>, 가변크기, 캔버스종이에 바디프린트, 2019
11 제니퍼 본스틴, <무제>, 23 x 25.5 cm, 동판화, 2018
12 박경종, <바이오 영상 시대 / Bio Media Era>, 13분 28초, 단채널 영상 설치, 2016
13 박경종, <네모난 이야기 더미 / Lays of Squares and Stories>, 140 x 100 cm, 2019
14 이바 로즈, <무제>, 38.1 x 27.9 cm, 종이에 바디프린트, 2019
Jennifer Borntein, Untitled, 2018
Etching, AP, 23 x 25.5 cm

Edward Mapplethorpe, Screw series, 2015

Photogravure, BAT, 43 x 53 cm

Shawn Park, Lays of Squares and Stories, 2019
140 x 100 cm

Eeva Rose, Whole and Parts, 2019

Body printing on canvas paper, dimension variable

Audrey Brown, I make girls, 2018

Pen and marker on paper, 21.5 x 28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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